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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이씨는(淸州李氏)는 시조(始祖) 태사(太師) 이능희(李能希)공이 고려(高麗) 개국(開國)에 참여하여 공신(功臣)이 되고 성(姓)을 받은 이래 6세(世)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 공승(公升)에 이르러 크게 빛났다. 공승의 큰 아들 춘로(春老)는 참지정사(參知政事)였고 둘째아들 계장(桂長)은 문하시랑동평장사(門下侍郞同平章事)였다. 그 이후로 현상양좌(賢相良佐)가 배출되어 고려 말에 9세 창우(昌佑)의 큰아들 계감(季瑊)은 랑성군(浪城君)에 봉해졌고 둘째아들 차감(次瑊)은 개성이씨(開城李氏)로 분관(分貫)했고 셋째아들 계성(季城)은 보은백(報恩伯)이 봉해졌다. 계감의 큰아들 정(挺)은 서원백(西原伯) 문간공(文簡公)이었고 둘째아들 방직(邦直)은 진현관(進賢館) 대제학(大提學)이었다. 계성의 큰아들 송고(松固)는 판도판서(版圖判書)였고 둘째아들 방고(旁固)는 행중낭장(行中郎將) 판도판서(版圖判書)였다. 정의 큰아들 유신(由信)은 형부낭중(刑部郞中)이었고 둘째아들 거인(居仁)은 검교좌정승(檢校左政丞 공절공(恭節公)이었고 셋째아들 거의(居義)는 공조전서(工曹典書)였고 넷째아들 거이(居易)는 문하좌정성(門下左政丞)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오르고 문도공(文度公)이었다. 문도공의 큰아들 상당군(上黨君) 애(愛)는 이태조(李太祖)의 부마(駙馬)였고 넷째아들 청평군(淸平郡) 백강(伯剛)은 태종(太宗)의 부마(駙馬)였다. 청주이씨는 지금까지 약 천백년 동안 수많은 명신, 충신, 학자 및 기업인 등 각계각층의 인재를 배출하여 국가 사회에 공헌한바가 크다. 특히 효종(孝宗)연간에 족보(族譜)를 매우 일찍 간행하여 숭조(崇祖)와 종족간 화합에 힘썼고 후손들이 전국 각지에 분포되어 살고 있다. 이러한 번영은 조상의 음덕(蔭德)에 힘입은 바 큰 것이고 이후에도 더욱 발전하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