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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이씨 시조공 휘능희

청주이씨(淸州李氏)는 시조(始祖) 이능희(李能希)公이 아들 겸의(謙宜)와 고려 태조를 도와 삼한(三韓)을 정벌하고 공신이 되어 벼슬이 벽상삼한삼중대광태사(壁上三韓三重大匡太師)에 오르고 식읍(食邑)이 3천호에 봉해졌다. 겸의(謙宜)는 맹부종신유일등(盟府從臣有一等) 전공을 세웠고 금자광록대부형관어사(金紫光祿大夫形官御史)에 이르렀다.

3세 원심(元審)은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태자태보(太子太保)였고, 4세 중강(仲降)은 정당문학상서우복야(政堂文學尙書右僕射)였으며, 5세 인지(仁至)는 개부의동삼사검교태부(開府儀同三司檢校太傅)였고, 6세 공승(公升)은 이부상서참지정사(吏部尙書參智政事)로 시호(諡號)는 문정공(文貞公)인데 청렴결백함이 뛰어났다.

 

공(公)은 2남(男)을 두었는데 장남 춘로(椿老)는 참지정사(參智政事) 시(諡) 정숙공(貞肅公)이고, 차남 계장(桂長 함흥파)은 중서문하평장사(中書文下平章事)이다. 8세 장(粧)은 증금자광록대부지문하성사(贈金紫光祿大夫知門下省事) 상장군(上將軍)이고, 9세 창우(昌祐)는 증광정대부판밀직사사(贈光靖大夫 判密直司使)에 오르고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계감(季瑊)은 중대광랑성군(重大匡琅城君)으로 시(諡) 정헌공(正憲公)이고, 차남 차감(次瑊)은 개성이씨로 분관(分貫)했으며 삼남 계성(季珹)은 판추밀원사(判樞密院事) 보은백(報恩伯)에 봉해졌다.

 

10세 계감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정(挺)은 광록대부형부상서(光錄大夫形部尙書) 증문하우정승서원백(贈門下右政丞西原伯) 시(諡) 문간공(文簡公)이고, 차남 방직(邦直 북청파)은 진현관대제학(進賢館大提學) 낭성군(琅城君)이다.

정(挺)은 4남을 두었는데 장남 유신(由信 홍성파)은 형부랑중(形部郞中)이고, 차남 거인(居仁 대구파)은 검교좌정승(檢校左政丞) 시(諡) 공절공(恭節公)이고, 3남 거의(居義 목천파)는 공조전서(工曹典書)이고, 4남 거이(居易 진천파)는 조선(朝鮮) 개국공신으로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 문하좌정승(門下左政丞)을 거쳐 영의정(領議政)에 오르고 시(諡) 문도공(文度公)이다.

公의 장남 애(薆)는 이태조(李太祖)의 부마(駙馬)로서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 시(諡) 경숙공(景肅公)으로 정사좌명공신(定社佐命功臣)이고, 4남 백강(伯剛)은 태종(太宗)의 부마(駙馬)로 좌명공신청평부원군(佐命功臣淸平府院君) 시(諡) 정절공(靖節公)이다. 10세 계성(季珹)은 두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 송고(松固 보은파)는 판도판서(版圖判書)이고, 차남 방고(芳固 해남파)는 행중랑장(行中郞將) 판도판서였다.

 

시조공 휘 능희의 시호는 안도공이다. 1954년 갑오 4월 25일에 충남 홍성군 홍동면 화신리 화신사에 위패를 봉안하였다. 기축보를 간행 한 후 2011년 보은 기산사에서 봉안되어 있던 영정을 화신사에 옮겨 봉안하고 있다.

 

역사

청주 이씨 시조 이능희(李能希)는 고려개국공신으로 벽상삼한(壁上三韓) 삼중대광(三重大匡) 태사(太師)를 지냈다. 그의 선계는 알려져 있지 않다.

《청주이씨족보(淸州李氏族譜)》에 보면 태사공 이능희 이후에 본관을 청주로 정하였다고 전한다.

이능희의 10세손 이계감(李季瑊)은 낭성군(郎城君)에 봉해졌고, 13세손 이애(李薆 : 李佇)가 정사좌명공신(定社佐命功臣)으로 상당부원군(上黨府院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청주를 본관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그런데 《관북파보(關北派譜)》(丁酉譜)의 서문에 6세 문정공(文貞公) 이공승(李公升)의 둘째 아들 평장공(平章公) 이계장(李桂長)이 입북 세거하여 청주이씨 관북파가 생겼다고 하고 있어 그 이전에 이미 청주지역을 중심으로 세거하며 관향으로 삼은 사실을 엿볼 수 있다.

 

본관

청주(淸州)는 충청북도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도청소재지이다. 삼한시대에 마한의 땅이었다가 백제시대에 상당현(上黨縣), 일명 낭비성(娘臂城) 또는 낭자곡(娘子谷)이라고도 하였다. 685년(신라 문무왕 5)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었고, 757년(경덕왕 16) 서원경(西原京)으로 승격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 청주(淸州)로 지명을 고쳤고 983년(성종 2) 청주목이 된 뒤 995년(성종 14)에는 절도사를 두었다. 1012년(현종 3)에 안무사로 바뀌었다. 1018년에 전국에 8개 목(牧)을 설치함에 따라 다시 청주목이 되고, 양광도(楊廣道)에 소속되었다. 1310년(충선왕 2)에 청주는 주(州)로 강등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목으로 복구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청주목을 유지하면서 충청도의 정치·행정의 중심지였으며, 1651년(효종 2)에는 충청도의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이전되어 충청도의 군사적인 중심지도 겸하였다. 그러나 역모사건 등으로 1656~1667년, 1681~1689년, 1804~1813년, 1826~1834년, 1862~1871년 등 여러 차례 서원현(西原縣) 등으로 강등되기도 하였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공주부 청주군이 되었고, 1896년에 충청북도 청주군이 되었다. 1906년 관찰사를 충주에서 청주로 이전함으로써 비로소 충청북도의 주도(主都)가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청주면(淸州面)이라 개칭하였고, 1931년에는 지방제도 개정에 따라 읍으로, 1946년에는 청주부(淸州府)로 승격하였다. 1949년 지방자치법에 따라 청주시로 개칭하였다.

시조공 휘 능희 영정